<치즈롤링 (Cheese Rolling)>
영국의 브록워스라는 시골 마을에는 치즈 롤링(Cheese Rolling)이라는 독특한 전통경주행사가 있다. 경사가 50도 가까이 되는 아찔한 비탈길에서 구르는 원통형 치즈를 수십 명의 사람들이 넘어지고 미끄러지며 쫒아간다. 근데 넘어지고 미끄러지는 정도가 제법 과격하다. 심지어 보호장비 비슷한 것조차 걸치지 않는다. 탈골과 골절이 예삿일이라 하니 보험회사들이 굉장히 싫어할 만한 행사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가장 먼저 무사히(?) 내려온 사람이 우승자가 된다는데, 우승을 목표로 한 진지한 참가자부터 참여 자체를 즐기는 참가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하는 경주 이벤트다. 치즈체이서(Cheese Chaser)는 이 경주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문과돌이의 무모한 도전>
나는 평생 문과돌이로 살았다. 여전히 문학, 역사, 철학, 사회과학 같은 인문학적인 책을 읽는 것을 즐긴다. 근래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유발 하라리 교수의 인류 삼부작(「사피엔스」, 「호모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무렵 갑자기 공부와 독서에 재미를 붙였다. 이미 과거의 공부에 관심이 없던 내가 '수학을 덜 한다.'는 간단한 이유로 문과를 선택하여 문과의 교과과정에 따라 공부했지만, 내가 1년만 일찍 공부에 관심이 있었더라도 이과를 선택하지 않았을까(아마 수2에서 많이 좌절했겠지만...)라는 헛상상도 하곤 했다. 무튼 유발 하라리의 책은 내가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이공계느님들에 대한 동경에 불꽃에 기름을 퍼부어주셨다.
참 묘한 타이밍이었다. 당시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만을 해왔는데도 여러 번 좌절했었고, 다시금 삶의 방향을 정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 낭만적인 충동만으로 진로를 결정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유발 하라리가 이야기하는 데이터와 기술에 대한 주장을 열렬히 비판적으로 수용하려 했지만, 그의 주장에 따라 내 나름대로 구상하는 나의 미래의 모습에는 굉장히 설득력이 있었다. 몇 주동안 머릿속에서 혼자 치열한 공방을 벌인 끝에,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의 균형점을 찾았다. 그렇게 정말 외계나 다름없던 데이터 분석과 백엔드 개발의 길에 도전하게 된다. 데이터분석과 개발이 만만해 보여 도전한 것은 절대 아니다. 그동안 마케팅을 해왔으니 '비전공자도 할 수 있어염!' 이라는 카피에 눈이 뒤집혀 발 들인 것도 아니다. 늦게 시작한 만큼 그 과정이 절대 쉽지 않고 수많은 좌절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나는 이 세상을 도도하게 지탱하고 주무르는 현실적인 전문능력을 얻고 싶었고, 그에 따라 선택한 길들이었다.
<치즈 체이서 (Cheese Chaser)>
방향은 선택했으니 이제 목표를 세울 순서였다. 이 즈음 넷플릭스에서 치즈 롤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이 치즈체이서들은 온몸에 멍이 드는 것은 기본이고, 운이 나쁘면 뼈가 부러질 수도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 레이스에 참여한다. 피나는 훈련(?)과 조기교육(?)을 통해 우승을 목표로 참여하는 사람도 있고, 그저 전통의 일부가 된 사실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마음가짐이야 어떻든 모두가 같은 길 위에서 같은 목적지를 향하며 "즐거워" 한다.
이러한 대목들이 나의 현 상황과 비슷한 것 같아 공감이 많이 되었다.
나는 앞으로 꾸준히 한계를 느끼고 좌절도 할 것이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지만 일단 시작했다.
목표야 세우겠지만, 우선적으로 목표에 다가가는 그 과정이 어떻게든 즐겁기를 바란다.
따라서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낙담하기보다 즐거운 과정 중 하나로 여길 것이다.
가장 먼저 치즈를 잡아 우승하는 것보다, 이 경주에 참여하고 전통을 이어나가는 것에 의의를 둘 것이다.
물론 목표보다 과정을, 우승보다 참여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노력을 게을리 해도 스스로 합리화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평소에 목표를 잡고 너무 과하게 노력을 해서 금세 지치거나 조급 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나를 위한 안전장치로서 나의 개발 예명을 치즈체이서로 잡았다. 앞으로 이 블로그에 냉정한 현실과 난제에 부딪혀도 익살스러움과 즐거움을 잃지 않는 개발 성장기를 계속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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