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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s/Yearly

20대 회고록 (2010~2019)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일은 당황스러우면서도 뭐랄까 새로운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만 같다. 사실 29살을 마무리하고 30대로 접어드는 2019년 겨울, 내 20대를 간략하게나마 반추해보는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당시 상황이 원만하지 않아 해내지 못했던 이 과제를 이번 회고록을 기회 삼아 나의 과거를 간략하게나마 정리하지 않을까 싶다. 두서 없이 장황해질까 걱정되긴 하지만 누가 보는 글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가는 대로 차분히 적어보려 한다.

 

 

< 20대 요약 >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방황을 하다가 고2가 되는 겨울방학에 정신이 번쩍들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치열하게 공부하여 2010년 3월, 서울 광진구에 위치한 대학교에 진학을 하여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공부하는 동안 지독할 정도로 혼자 다녔기 때문에 사람이 그리웠다. 그래서 대외활동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서서 사람만나는 일에 몰두했다. 학교 성적은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2012년 여름, 춘천 102보충대로 입대하여 강원도 화천 GOP에서 군복무를 하고 2014년 봄에 전역을 한다. 이 때는 또 군대에 있기 때문에 생긴 사람들의 그리움으로 또 다시 대외활동에 매진한다. 하지만 1, 2학년 때 강력하게 만들어 놓은 학점 구멍을 열심히 수습하는 것도 병행했다. 그렇게 2017년 2월, 다소 유난하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운 대학생활을 마친다.

 

당시 스스로를 당돌한 낭만주의적 지식인이라 믿었기에 당장 취업전선에 뛰어들 의사가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을 더 경험해도 될 나이라 멋대로 믿었고, 학과 동기의 아버지가 충북 제천에서 시작하신 카라반 캠핑장 사업에 매력을 느껴 건설노동자로 동참한다. 하지만 이내 세상이 자신을 호락호락 본 자들에게 주는 특별 고배를 시원하게 마시게 된다. 그렇게 반 년도 버티지 못하고 철수하게 된다. 그 이후 약 3개월의 시간동안 갖고 있는 잔기술 중 하나인 영상제작으로 틈틈히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다 2017년 9월, 서울의 여행콘텐츠 제작 스타트업에 일자리를 얻어 정규직의 이름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2017년 봄, 제천 카라반 캠핑장(좌) & 2017 여름, 레드불 투어행사 영상촬영

 

 

Red Bull Three Style University 2017 Tour Video

 


 

< 28살: 첫 직장과 서울 >

2017년 9월, 서울 압구정의 여행콘텐츠 제작 스타트업에서 일 자리 제안을 해주셨다. 일자리 제안을 받기 2년 전인 2015년 부터 다국적 음료기업 레드불(Red Bull) 한국 지사에서 대학생 마케팅 인턴 개념의 대외활동을 했었다. 활동 기간 중에 대학생 여행 이벤트(Red Bull Can You Make It? 2016)의 프로모션과 집행을 담당하였는데, 열 일 제쳐두고(예를 들면 학점) 매달린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성과도 제법 괜찮았다. 일 자리를 제안 받은 회사는 이 때 처음 업무적으로 인연이 시작되었다. 대체 어디를 믿음직스럽게 봐주셨는지 제안 받은 자리는 BTL 매니저였다. 존경했던 대표님이 이끄는 회사라 냉큼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1년 6개월 뒤, 2019년 3월에 그만두었다. 당시에 퇴사를 결심했던 이유를 기억을 더듬어 정리해보면 이렇다.

 

 

첫 번째, 직업으로써 이렇다 할 전문성을 키우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직함이야 그럴 듯한 매니저이지만 SNS 콘텐츠 제작에 주력한 회사였기 때문에 오프라인 팀원은 내가 전부였다. 즉, 팀장이자 막내였다. 자연스레 프로젝트에 책임을 지는 역할부터 영수증을 모아 풀칠하는 일까지 도맡았다. 대학시절 다양한 대외활동을 통해 이벤트나 행사를 통해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일이 나의 적성에 맞다 생각했다. 때문에 감당해야하는 업무량은 많았지만 일 자체는 대체로 즐겼다. 회사의 동료들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에 불쑥 회의감이 찾아온 것은 업무의 단순함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스타트업 직원답게 야근은 잦았지만, 프로젝트의 완성도를 1%라도 올리고 싶은 개인적인 욕심에 자진하여 과제를 늘렸기 때문에 불만은 없었다. 아쉬운 점을 찾으라면 동료의 부재와 업무의 난이도였다. 일은 할 만하냐는 주변의 질문에 나는 항상 '어려운 일은 없는데, 그냥 혼자 하다보니 일을 오래 하게 된다.'라고 답변했다. 물론 단순업무라 할지라도 태산처럼 쌓인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능력도 매우 중요한 전문성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많은 고민과 지식을 통해 뛰어난 동료들과 함께 얽히고설킨 문제를 풀어내는 성취감을 원했다. 애석하게도 나에게는 혼자서 복잡한 프로젝트나 직원을 채용해야 할 규모의 사업을 키울 능력이 없었다.

 

 

두 번째, 뚜렷한 방향성이 있는 직업관을 정립하고 싶었다. 첫 번째 이유의 연장선상이다. 문득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을 10년 동안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어떻게 성장해 있을지 상상할 때가 있었다. 영화 어벤져스의 닥터 스트레인지 마냥 미래를 여러번 돌려가며 상상해봐도 지금 하는 일을 계속 했을 때 내가 되고픈 사회인의 모습을 그리기 힘들었다. 나는 나 자신의 성장목표와 과정을 참 중요시 했다. 대학시절의 성장목표와 과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원하는 시기에 전공을 살려 만족스러운 '직장'을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빠르게' 습득하는 것이었다. 즉, 방향보다는 속도를, 나아가 직업보다는 직장에 가치를 두었다. 빈약한 목표를 성취한 후에 찾아오는 공허함은 제법 오래 갔다. 기회가 있다면 직업관을 정립하고  다른 일을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었다.

 

 

마지막 이유는 가장 간결하고 강력했다. 미세먼지가 가득 낀 서울의 뿌연 하늘 아래서 하루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여행콘텐츠 회사에 적을 두고 있는 동안 11개국 15개 도시에 출장을 다녔왔다. 행운이라 표현하는 이유는 회사의 힘을 빌려 정말 분에 넘칠 정도로 다양한 국가와 도시에서 다채로운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불운이라고 표현하기엔 무례하지만) 불운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세상의 아주 일부분이었지만, 그럼에도 좋은 도시들을 둘러보고, 생활하고 경험하며 나에게 수많은 삶의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어설프게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밖을 벗어나 선진국에 가서 산다면 행복해 질 것이라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으며, 이 지구상에 '천국'같이 살기 좋은 곳은 없다 확신한다. 대신 사람들은 자기가 견딜만한 지옥을 선택해서 살아 간다고 지금도 믿는다. 서울은 내가 견디고 싶지 않은 요소들이 두 가지 있었다. 미세먼지가 가득 낀 하늘이 대표적이었고 무표정의 사람들이 가득 찬 출퇴근의 지하철이 그것들이었다.

 

정리하자면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 이런 회사 더이상 다닐 수 없다 마음 먹을 정도로 큰 문제점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조용히 파란 하늘이 있는 낯선 환경에서의 새로운 직업에 대한 기회를 기다렸다. 나에게는 아직 에너지와 시간이 남아 있다 믿었다. 그리고 기회는 제주도에서 찾아왔다.

 


 

<29살: 목공과 제주도>

2019년 3월 13일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에 도착했다. 나의 목표는 목수로서 제주도에 정착하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졸업을 앞두었을 무렵, 우연히 유투브에서 나무집을 짓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숲에서 나무를 베는 과정부터 2층 목조 주택을 완성하는 과정을 담은 26분 가량의 긴 영상이었지만 보는 내내 가슴이 뜨거워졌다. '내가 또는 나의 가족이 사는 공간을 직접 만들겠다.'라는 뚜렷한 인생목표가 생긴 순간이었다. 그 영상에서 충격을 받은 이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목공과 관련된 영상과 글들을 보고 읽었다. 하지만 목공은 목수의 눈과 머리보다 손 끝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작업이다. 때문에 직접 목재를 손으로 만지고 작업하기 전까지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졸업하고 난 후 충북 제천의 카라반 캠핑장 공사장에서 일할 기회가 있을 때 고민 없이 떠날 수 있었다. 5개월만에 끝난 제천에서의 경험이 그다지 성공적이라 볼 수는 없었지만, 현장의 작업이 알고보니 적성이 맞지 않는 등의 문제로 철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목공에 대한 아쉬움은 남아있었다. 그 갈증은 서울의 직장을 다니면서 주말에 목공방을 다니며 목공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해소했다.

 

 

서울 논현동의 목공방(좌)과 제주 남원읍 첫 현장에서 제작한 의자들

 

 

그러다 2019년 2월, 서울에서 사는 것에 대한 피로감, 그리고 전문직에 대한 갈망이 여전할 무렵, 서울을 벗어날 수 있으며 다시 목공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심지어 그 곳은 대한민국의 가장 아름다운 섬인 제주도였다. 고민하는 척은 했지만 마음은 이미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해있었다. 짧은 사회생활기간 동안에도 노력과 열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이루고 얻었던 경험이 이번에도 나를 자신감에 차게 만들었다. 그리고 2년 전 외롭고 지루한 외지 시골생활에 제법 잘 적응했던 경험도 있지 않은가. 내가 노력만 한다면 목공으로 꾸준히 생계를 유지하고 결국엔 나만의 작업도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제주도 정착의 계획은 9개월만에 막을 내렸다. 나의 자존감을 보호하고자 하는 무의식이 어떻게든 좋은 의미로 포장하려 했지만, 명백한 계획실패였다. 사회적 보호장치가 없는 건축노동자의 임금구조, 나누어 먹을 파이의 크기가 작은 지방의 경제규모 등 녹록치 않은 현실의 벽을 넘을 정도로 나의 능력과 열정은 특출나지 않았다. 신세한탄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각설하자. 경제적인 문제로 제주생활이 쉽지는 않았지만 나의 공간을 직접 만들겠다는 꿈은 전혀 시들지 않았다. 이대로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2010년 1월, 이번엔 호주로 떠나게 된다.

 


 

<30살 상반기: 다시 육지>

마지막 도전의 땅으로 호주를 선택한 이유는 3가지 였다. 첫째, 작게나마 목공을 할 수 있는 빈 공간이 있는 집을 얻을 기회가 높다. 둘째, 예전만큼은 아니라지만 아직 영주권의 기회가 열려 있는 나라이다. 마지막으로 파란 하늘이었다. 하지만 이게 웬 것을. 망할 때는 차라리 화끈하게 망하라고, 코로나의 확산으로 뭐 하나 제대로 시작해보지 못하고 3개월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혼자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느꼈던 그 착잡함은 잊을 수가 없다. 매일 보았던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싶어 떠나는 날까지 눈에 욱여넣듯이 계속 하늘만 올려다 보았다.

 

퀸즐랜드의 농업지역 번다버그에서 2개월 정도 생활했다. 이곳의 식료품점도 코로나 포비아로 인해 파스타, 휴지, 쌀 등이 구하기 어려웠다.

 

2020년 4월 15일 아침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부모님이 계시는 평택에서 시가 운영하는 공공시설에서 2주간 격리할 계획이었다. 비행기에서 잠을 거의 못자 멍한 상태로 방호복을 입은 공항관계자들의 일사분란한 안내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어느덧 격리시설에 도착했다. 좌절은 비행기 안에서 실컷 했으니 이제 다시 현실을 살아내야 할 때였다. 격리시설은 산간벽지에 있었지만 무선인터넷은 훌륭했다. 대한민국의 통신시설에 새삼 감격하며 밤낮으로 인터넷을 뒤적이며 구직을 시작했다.

 

혼자 2주 동안 생활하기엔 너무 넓었던 방, 오랜만에 뵌 부모님은 이렇게 인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동안 내가 종사했던 분야는 여행과 BTL(오프라인 광고)업이다. 즉, 코로나로 궤멸당한 대표적인 두가지 업계인 것이다. 내 경력이 애매한 것 같은데 어디 가서 경력을 어필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은 안해도 되었다. 그래도 콘텐츠업계 또는 광고업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버틸 수 있는 환경을 고려하여 회사에 지원서를 넣었다. 주로 광고대행사에 이력서를 제출했고 면접기회도 몇차례 잡혔다. 하지만 면접장에서의 나의 심경이 참 묘했다. 합격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합격하고 싶지도 않았다. 당장 일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는 조급함과 조금 더 진로와 전문성을 고민해보고 싶다는 신중함이 충돌했다. 이런 혼란을 겪고 있으니 일자리에 대한 간절함은 부족해졌다. 이런 부족한 간절함이 면접관분들의 눈에도 보였는지 면접에서도 연달아 낙방했다. 시간은 또 어찌나 빠른지 3개월이 훌쩍 지나 여름이 되었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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