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살이 된 2020년 가을에 태어나 처음 Java로 코딩 한 줄을 적어 보았다. 같은 해 12월인 지금, 개발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한 지는 4개월이 채 되지 않아 이 회고록에 적을 기술적인 내용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동안 나와는 연관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세상으로만 생각했던 개발을 직업으로 삼고자 한 동기와 마음가짐은 꼭 기록해 두고 싶다.
개발이라는 분야는 정말 고개만 돌리면 공부할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내 키보다 높이 쌓아 둔 책들로 만든 미로를 걷는 기분이다. 실제로 미로를 헤쳐 나가는 것처럼 어느 때는 길을 찾아가는 성취감과 희열을 느끼기도 하며 때로는 엄습하는 혼란과 위압감, 그에 따른 낙담을 느끼기도 한다. 아직까지는 비율로 따지자면 3:7 정도로 후자의 상황을 더 자주 경험하고 있다. 길을 잃고 방향감각마저 까무룩 해졌다면 다시금 방향을 찾을 수 있는 기준점이 꼭 있어야 한다. 이 2020년의 회고록이 미래의 방황하는 나에게 나침반과 북극성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이때 정말 현명한 선택을 했고 이 선택을 옳게 만들기 위해 아낌없이 노력했다고 스스로에게 칭찬하고 싶다.
<30살 여름: 재정립>
2020년 8월로 들어설 때, 지금까지의 콘텐츠 제작과 마케팅의 경력을 매몰비용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즉, 그동안 콘텐츠 제작과 마케팅 분야에서 대외활동과 실무를 통해 쌓아둔 경험이 아까워서 이를 활용해 직장을 구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개발과 데이터 분석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이런 결정을 내리는 배경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 사회 기저의 흐름을 파악하는 전문능력을 얻고 싶었다.
- 언제든 대체가 가능한 인력이라는 공포를 없애고 싶었다.
- 업무 공간이 비교적 유연하고 자유로운 직업을 갖고 싶었다.
[ 사회의 흐름을 파악하는 전문능력 ]
콘텐츠 제작과 BTL마케팅이 즐거웠던 것은 업무의 결과물을 즉각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이 분야들은 프로젝트 수행의 흐름이 빠르다. 달리 말하면, 대중들의 시선과 공감을 이끌어 내는 밈(Meme)의 갈수록 수명이 짧아지기 때문에 업무의 진행이 빨라야만 한다. 이 밈이라는 것은 바다나 호수에 비유하자면 외부 환경에 따라 시시각각 모습이 변하는 물의 표면 같다 생각했다. 나는 이 문화적 유전자로 파도를 만들고 그 위에 올라 노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매번 불규칙한 변화에 장단을 맞추기에는 나의 에너지와 감각에 곧 한계가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대응한 나의 대비책은 최대한 많은 사례의 마케팅과 콘텐츠 제작사례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마지막 장을 덮은 책이 많아질수록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파도의 방향과 크기를 결정짓는 큰 요인은 규칙적인 계절풍과 조류 그리고 더욱 근본적인 해저 지형인데, 파도가 일어나는 물의 표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정치체제, 경제구조 그리고 인간의 근원적인 본능 등 더욱 주시해야하는 사회의 근본들을 경시해왔었다. 그 이유를 자문해보니 이러한 일들이 따분해 보여서였다. 참 가볍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겉멋을 덜어내고 보니 주변에 이 사회의 흐름을 도도하게 주무르며 움직이게 하는 일들이 많았다. 참 뒤늦게도 세상이 흘러가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겼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직업관을 재정립하고 싶었다. 단순히 직업관을 다듬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세상의 비밀과 규칙을 파고들어 알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가 생겼다. 이러한 요구가 자라다보니 데이터 분석이라는 분야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 대체가능성에 대한 공포 ]
나는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프로젝트 과정에서 겪는 역경들을 극복해 나가며 성공적으로 일을 마쳤을 때 얻는 성취감이 무엇보다 짜릿하다. 이런 나에게 나의 노동의 가치가 무의미해지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은 큰 공포였다. 이 공포는 FAANG(Facebook Apple Amazon Netflix Google)이라고 일컫는 글로벌 IT 플랫폼 기업들의 사업과 인사구조에 대한 정보를 접하며 시작됐다. 그때 느낀 바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그들의 사업을 확장하고 유지하는 데에는 많은 사람들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추천 알고리즘들은 마케팅 업계 종사자들에게 큰 위협이 될 것만 같았다. 특히나 '앞으로의 기술 혁신을 통한 산업 구조의 변화는 중간 기술직들의 자리를 위협할 것'이라는' 문장이 폐부를 찔렀다. 굳이 기계가 대체할 필요가 없는 아주 단순한 일, 아니면 아직 기계가 할 수 없는 고관여의 전문적인 일이 아니면 대체 가능성의 위험한 줄타기를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내가 특정 분야의 탄탄한 전문성을 쌓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마케팅 업계에서 중간 기술직 이상의 위치에 다다를 방법은 모호하기만 했다. 나의 노동의 무가치해질 수 있는 미래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고 있었다.
옷장 속에 있는 괴물의 모습을 상상할수록 더 기괴하고 공포스러워 지는 것처럼 우리는 뚜렷한 정체를 모르는 대상에 대한 공포를 계속 키워나간다. 내게는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이 옷장 속의 괴물이었다. 내가 선택한 공포를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그 옷장 문을 열어보는 것이었다.
[ 공간으로부터의 자유 ]
마지막은 참 한결같은 나의 목표다. 나는 기회가 있다면 번잡한 도시에 거리를 두고 파란 하늘을 보며 살고 싶다. 하지만 막연하게 도시는 떠나는 것은 굉장히 무모하다는 것을 제주도의 생활을 통해 깨달았다. '이촌향도'.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촌락의 인구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사회탐구 과목 중 하나로 선택했던 지리 교과서에서 수십 번 읽어 보았던 용어다. 이러한 개념만으로 농촌에서의 경제활동이 매우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하는 성격과 넘치는 자신감 덕에 제주도 땅을 밟았었다. 다행히도(?) 살고 있는 지역에 돈과 기회가 활발하게 돌지 않았을 때, 개인에게 어떤 경제적 장벽들이 생기는지 절절히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젊음과 패기로 무엇이든 해낼 것이라는 마음가짐은, 제주도를 떠나는 날 그곳에 두고 왔다. 하지만 언젠가는 도시에서 벗어나 살고 싶다는 바람은 육지까지 들고 와 버렸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적어도 10년 동안은 서울에서 세상 어디에 떨어지게 되어도 생존할 수 있는 현실적인 시각과 능력을 기르겠다고 독하게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동안 낭만이 내 머릿속에서 실컷 일했으니 이제 퇴근시켜줄 때가 되었다.
전 직장에 있을 때 독일 베를린으로 한 달간 출장을 갔었다. 그 기간 중 베를린 시내의 한 공유 사무실을 사용했었는데 하루는 잠깐 맞은편 책상에 앉은 분과 대화를 잠깐 나눈 적이 있었다. 그분은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개발자였고,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에서 까지 일을 하다 베를린에 들어온지는 얼마 안 되었다 했다. 그 분과 이어지는 대화에서 자신은 사실 랩탑과 인터넷만 있으면 전 세계 어디에서든 일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을 참 인상 깊게 들었다. 나는 그동안 은연중에 그분의 랩탑과 인터넷과 같은 나만의 지구적인 생존 도구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라 생각했다.
2020년 7월은 이런 세 가지 주제들의 생각들이 휘몰아치는 한 달이었다. 그동안 보고 읽고 생각했던 것들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고민하여 나름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어냈다.
- 사회 기저의 흐름을 파악하는 전문능력을 얻고 싶었다.
→ 사회의 흐름을 가장 잘게 쪼갠 데이터를 다루는 법부터 공부해보자. (데이터 분석) - 언제든 대체가 가능한 인력이라는 공포를 없애고 싶었다.
→ 내가 기계로 인력을 대체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갖자. (개발/인공지능) - 업무 공간이 비교적 유연하고 자유로운 직업을 갖고 싶었다.
→ 10년은 현실적인 힘을 얻기 위해 다시 공부하자. (서울)
위 문장들을 공책에 꾹꾹 눌러쓴 그 다음날, 바로 서점에 가서 데이터 분석 자격증 참고서와 개발 입문 도서 몇 권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2020년 8월: ADsP>
2020년 8월 1일,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에서 주관하는 데이터 분석 준전문가 자격증 준비를 시작했다. 알아본 바로는 데이터 분석의 기본적인 개념들을 얻기에 좋은 시험이라 했다. 분명 사람들은 기본적인 개념들이라 했는데, 복잡한 수학기호들이 군데군데 보이는 참고서는 평생 문과돌이로 살아온 나에게 다소 위협적이었다. 따라서 인터넷 강의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구직을 따로 하지 않았으니 공부할 시간은 많았다. 오랜만에 하는 공부라 재미있었다. 시험은 공부를 시작한 지 정확히 4주 뒤인 8월 29일이었다. 공부할 기간은 넉넉했지만 책과 강의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긴장을 유지하며 공부했다. 다행히 시험에는 한 번에 합격했다.
<2020년 9월: 국비지원교육 시작>
사실 데이터분석을 시작하면서 3~4개월 정도 노력해서 자격증 몇 개를 따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알량한 생각은 열흘만에 박살 났고, 데이터 분석의 분야와 깊이는 보통의 노력과 인내심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당장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 않더라도 데이터 분석은 차분하게 계속 공부하고 싶었다.
걱정은 개발에 대한 공부였는데, 지금 자격증 준비하는 것처럼, 혼자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서 공부하기엔 한계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것저석 알아보는 도중, 개발을 새로 배우기 시작하는 비전공자들의 일반적인 수순에 따라 나도 국비지원 교육제도에 대해 알게 되었다. 몇몇 특별한 강사님을 제외하고는 강의의 퀄리티가 대동소이하다 하여, 가장 빨리 시작하는 학원을 선택하여 교육받기를 시작했다. 강의기간은 6개월이며, 3개월은 자바와 스프링, 나머지 기간은 파이썬과 R로 데이터 분석을 공부하는 과정이었다.
9월 1일에 개강예정이었던 강의는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9월 7일로 연기되었다. 확산세가 심해져 9월 7일에도 학원 출석이 금지되었지만, 개강은 미룰 수 없어 원격강의로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9월 한 달 동안은 Java의 기본에 대해 중점적으로 배웠다. 다행히 공부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었다. 외계인들이 하는 줄만 알았던 프로그래밍을 아주 미약하게나마 이해하고 코딩으로 컴퓨터와 대화하는 그 느낌이 정말 짜릿했다.
<2020년 10월: DB & Front-End 맛보기>
- 10월 첫째주: 추석연휴
- 데이터분석자격증을 공부하면서 연속형확률변수를 다룰 때 미적분을 몰라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한 번 사는 인생 미적분을 모르면 되나 싶어서 나가노 히로유키의 「다시 미분 적분」책으로 미적분을 독학했다. 글을 쓰는 지금 12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 10월 둘째주: Oracle / SQL
- Oracle RDMBS에 대한 개념과 SQL의 기본을 배웠다. 학원생활 패턴에 적응했던 때라 수업이 끝난 후에도 개인적인 공부병행을 시작한 시기였다. - 10월 셋째주: JDBC / HTML / CSS
- Web의 기초 개념과 웹 구성에 대한 기초를 배웠다. Tomcat으로 크롬 브라우저에 'Hello World'를 띄웠을 때 정말 세상과 인사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의 적성은 백엔드에 가깝다는 것을 느낀 한 주였다. - 10월 넷째주: Javascript / JQuery
- 프론트엔드의 이벤트 제어 언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JQuery와 Javascipt의 특성과 활용방식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었지만, 빨리 넘어가버려서 아쉬웠다. - 10월 마지막 주: JSP / DBCP & JNDI / Ajax
- 웹의 구조와 데이터 처리 방식을 집중적으로 공부한 한 주. 사실 아직도 이 개념들 중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 따로 공부가 더 필요하다.
+ 2020년 초에 IELTS라는 영어자격증을 취득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생소한 자격증이라 TOEIC 점수도 얻어 놓기로 한다. 공부를 틈틈히 해서 10월 10일 시험 응시를 했다. 생각보다 성적이 잘 나와서 생겨버린 자신감에 11월에 과감한 결정을 해버리게 된다.
<2020년 11월: Back-End 맛보기>
- 11월 첫째주: MyBatis
- 본격적으로 Spring을 시작하기 전 ORM 중 하나인 MyBatis에 대한 개념과 Model 2를 기반으로한 웹으로 실습하며 한 주의 수업이 진행되었다.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에서 주관하는 SQLD(SQL 개발자) 자격증 시험도 따로 준비를 시작했다. - 11월 둘째주 & 셋째주: MVC / Spring
- Spring을 활용하여 MVC 모델의 웹 구축에 대한 개념과 실습이 주로 진행되었다. MVC 사이에서 이루어 지는 상호작용들이 생소하여 처음엔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웠지만, 하나하나 파고들어 이해하려는 과정이 참 재미있었고, 결국 이해하여 내가 응용할 수 있는 단계에서 느꼈던 희열이 매우 컸다. 그리고 이 즈음에 흐릿했던 OOP의 개념이 조금씩 체계적으로 잡히기 시작했다. - 11월 넷째주 & 마지막 주: Python
- 코로나 일별 확진자의 수가 급증하여 Spring 교육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원격교육이 시작되었다. 사실 개발을 배우는 입장에서 실습과 그 과정에서 생기는 버그를 강사님의 지도를 받으며 디버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정인데, 원격교육 사실상 반 쪽 짜리 수업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커리큘럼 보다 이르게 파이썬의 기초를 배우기 시작했다.
+ 11월 중순 즈음 공부하던 SQLD에 회의감이 들었다. SQL 자체 보다는 책으로 코드를 읽고 문제를 맞추려 코딩을 이해하려는 것이 옳지 않다고 느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인터넷 강의의 퀄리티가 좋다는 Udemy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블랙프라이데이 행사를 하고있던 것이었다! 마침 책으로 하는 공부가 질렸었고, 또 마침 예전에 사용하던 영상장비들도 처분해 돈도 있었다. 그리고 또 마침 저번 영어성적에서 듣기점수가 잘 나왔지 않았는가! 하여 정신을 차려보니 강의 15개를 구매해버렸다.
<2020년 12월: 혼란>
12월은 밀려오는 조급함에 갈팡질팡하는 한 달이었다. 조급함이 생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길어지는 원격수업과 잃어가는 집중력. 학원은 계속 원격으로 수업을 하였다. 파이썬의 기본 문법을 빠르게 끝내고 데이터분석에 대한 수업을 진행했다. 나는 궁금한 것들이 있는데 어설프게 알고 넘어가면 굉장히 찝찝하다. 그런데 원격 수업을 듣다보면 그 찝찝함을 연속적으로 느껴야 했다. 현장 강의에서는 강사님의 학생들의 반응을 보며 이해시켜주시기 위해 노력하셨지만, 원격 강의에서는 이것에 한계가 있었다. 나의 이해하는 속도와 무관하게 수업이 진행되니, 내가 잠깐 이해가 안되는 부분을 정리하고 있으면 진도는 저만치 나가있었다. 그렇다고 이해가 안된채로 마냥 코드 받아쓰기하며 수업을 듣자니 그대로도 참 답답하였다. 강사님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원격수업이 3주 넘게 지속되자 학원 수업에 집중하는 것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두번째, 팀 프로젝트 진행 장애. 개발자에게 사이드 프로젝트가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한 글들은 많이 보아 그 중요성은 인지하고 있었다. 학원에서 팀프로젝트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별도의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보다 기본 개념들을 공부하고자 했다. 12월 초 학원에서는 프로젝트를 시작하라고 팀을 구성해 주었다. 당시만 해도 곧 거리두기가 완화될 줄 알았다. 그래서 팀원들과 다시 학원에 출석할 수 있을 때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하자고 합의 했다. 그동안 나는 자바보다 흥미있었던 파이썬을 조금 더 공부하고 싶어 Udemy 잔뜩 사둔 강의 중 파이썬 강좌를 주로 수강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코로나 확진자 수는 오히려 증가했고, 인터넷 강의를 하나 둘 씩 완강해도 다시 출석할 수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학원 수업을 듣기 시작한지는 4개월이 다 되어가 있었고, 강의를 여러개 들었지만 아직 만들어 놓은게 없으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시점은, 12월 30일이다. 조급함을 진정시키고 건설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정리한 생각들은 이렇다. 첫째, 나는 지금 데이터분석을 제대로 다루기 위한 통계, 선형대수, 알고리즘 등의 기본기가 너무 부족하다. 학원 수업의 코드를 보고 이해하려 노력하되,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시간을 갖고 코드 자체보다 기본 개념에 주력하기로 한다. 이 것이 더 멀리 갈 수 있는 탄탄한 길이라 믿는다. 둘 째, 따라서 당장은 백엔드 개발 공부에 개인 시간을 더 투자하려 한다. 학원의 팀 프로젝트는 화상회의를 통해서라도 진행을 하고, 남은 학원의 수료기간동안에는 자바의 스프링과 파이썬의 장고 이 두 가지 프레임 워크의 숙련도를 키우기 위한 공부를 1순위로 삼으려 한다. 시간이 남는다면 백엔드 개발의 디자인 패턴이나 클린 코드 작성법들을 데이터 분석에 대한 공부보다 우선순위에 놓을 계획이다.
<2020년을 마무리하며>
이 회고록은 Notion에서 처음 쓰기 시작했다. Notion에서 새로운 문서를 시작하면 제목 윗 부분에 아이콘이 임의로 자동생성된다. 이 회고록 파일을 만들 때는 립스틱 아이콘이 만들어졌다. 보통은 이런 엉뚱한 아이콘들을 글의 주제에 맞춰 바꾸지만 문득 한 때 즐겨 듣던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의 가사 몇 줄이 생각이 났다. 어설프게 우리말로 옮기면 이런 내용이다.
My mama told me when I was young, We are all born superstars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적, 우리는 모두 슈퍼스타로 태어난다 말하셨어)
She pulled my hair and put my lipstick on In the glass of her boudoir.
(어머니는 나를 안방 거울 앞에서 내 머리를 빗고 립스틱을 발라주셨지)
(중략) She said, ... 'So hold your head up girl and you'll go far.'
(그러니 고개를 들어라 아가 넌 크게 될거란다)
(중략) I'm on right track, I was born this way.
(난 잘하고 있어, 난 원래 이렇게 태어났거든)
나의 부모님은 내가 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사고를 치고 다닐 때도 나를 믿어주셨다. 대학교 전공을 선택할 때도, 학점을 말아 먹고 대외활동을 할때도 언제나 나의 결정과 가치관을 존중해주셨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막노동 현장을 간다 할 때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타지에 가서 목수를 한다 할 때도 언제나 나를 응원해주셨다. 나의 부모님은 지혜로운 분들이시다. 두 분 모두 공부도 많이 하셨고 사회경험도 풍부하게 하신 분들이다. 두 분의 눈에는 자신의 아들이 사회적으로 순탄하지 않은, 다소 미련하고 무모한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 보였을 것이다.
2019월 12월, 빈 손으로 제주도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4개월 후인 2020년 4월, 또 호주에서 빈 손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모든 순간에도 부모님은 짧은 생각으로 내린 나의 선택에 대해 한 마디도 안하시고 그저 따뜻하게 나를 반겨주셨다.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든 내가 하고 싶은 일이하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응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씀대로 개발과 데이터분석을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도 망설임 없이 힘을 보태주셨다. 저 노래의 가사를 빌리자면 나의 부모님은 또 다시 나의 머리를 빗고 립스틱을 발라주며 나를 응원해주셨다.
올 한해를 돌아봤을 때 가장 굵직했던 감정은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과 감사함이다. 이 것들이 지금 나의 행복의 방향이고 고통을 극복하는 원동력이다. 다사다난했던 2020년을 정리하고 2021을 맞이하는 마음가짐을 바로 잡기에 저 립스틱의 아이콘이 참 적당해보였다. 내년 이맘때도 가족들과 함께 건강한 모습으로 요즘 공부가 잘 되고 있다는 대화를 하며 따뜻하게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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